– 한누리갈등관리조정센터(센터장 조정혜) 갈등관리전문가 3급과정
[서울교육방송 교육뉴스]=니클라스 루만에 대한 통쾌한, 저돌적, 입체적 소개로 유명한 이철 교수의 강좌가 갈등관리전문가 3급과정 워크샵에서 펼쳐진다는 정보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기다림이었다. 작가는 누구나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내면의 사상을 표출하고, 요리사는 누구나 가장 맛있는 음식을 내놓기 마련이다. 이철 교수가 소개할 니클라스 루만에 대한 강좌는 가장 의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을 것같아, ‘피고인’ 월화 드라마를 기다리듯 기다렸다.
“니클라스 루만은 독일의 사회학자입니다. 100권의 책을 저술하고, 450편의 논문을 쓰면서 생각의 방식을 뒤바꿨고, 사람과 사회를 분리했고, 생각의 패러다임이 워낙에 역발상이어서, ‘엉뚱함’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니클라스 루만의 이론은 인간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합니다. 지금껏 우리는 사회속에 인간이 속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의 구성원이고, 인간이 모이면 사회가 된다고 했는데, 니클라스 루만은 인간과 사회를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전문용어로 말하면 ‘자기생산체계’로서 인간도 자체로서 사회를 이루고,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사회는 ‘소통의 구조’로서 사회를 이룬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니클라스 루만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니클라스 루만은 모든 학문에 영향을 미쳤고, 사회학자 파슨스와 양대산맥을 이룰 정도로 저명한 인물입니다” (이철 교수 강의에 대한 노트기록 편집)
100권의 책을 썼다는 말에 눈이 번쩍 띄였다. 2년전, 지인(知人)의 소개로 니클라스 루만을 들어본 적은 있는데, 또다시 니클라스 루만을 소개받으니, 느낌이 남달랐다. 2시간으로 할당된 이철 교수의 강좌에서 100권의 니클라스 루만의 사상이 압축된다는 것은 120분에 100권을 나눈다고 하더라도, 1분에 1권의 내용을 요약해 설명하는 것도 시간은 역부족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생애를 설명하는데 30분이 훌쩍 지났다. 자신의 멘토를 소개하듯, 니클라스 루만에 대한 팬(fan)처럼 열정적으로 소개하는 이철 교수의 강좌에는 니클라스 루만에 대한 사상이 분명 살아있었다. 이철 교수가 설명한 핵심은 ‘인간에 대한 해석’이었다. 인간을 유기체, 의식, 소통으로 구분했다. 육체로서 사람, 두뇌활동, 사람들과 소통의 3가지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사람속에 뇌가 있고, 사람은 움직이면서 두뇌활동을 통해 사람들과 대화로 소통하면서 살아가는데, 3가지를 각각 구분한다는 개념이 정말로 당혹스럽고, ‘엉뚱’했다.
그러나, 설명을 자세히 듣고보니, 과학자들이 발견한 원자의 구조처럼, 혹은 DNA 구조처럼, 혹은 갈릴레이가 발견한 지동성의 증거처럼, 생각의 움직임을 가장 정확히 파악한 ‘사회학자의 발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미경은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듯, 니클라스 루만도 오랜세월 자신의 생각과 상대의 생각과 사회의 생각에 대해, 수많은 관찰과 고찰을 토대로, 역사의 생각들까지 포함해서 관찰과 고찰을 통해서 ‘생각과 의식의 교환’의 관점에서 ‘소통구조’를 정의했을 것이다. 과학자가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산소와 수소로 결합한 물을 인류는 마시고 있었듯,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하기 전에도 만유인력 법칙이 있었듯, 인류는 의식과 소통의 구조속에 살아왔고, 그러한 생각의 원리를 이해함으로 방대해진 사회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이철 교수는 칠판에 생각-말함-들음-수용의 4단어를 기술했다. 앞의 생각은 화자(話者)이고, 뒤의 수용은 청자(聽者)에 해당된다. 수용은 곧 이해, 또는 생각이다. 생각과 말함은 화자의 것이고, 들음과 수용은 청자의 것이다. 이때, 소통(언어의 교통, 또는 언어의 통보경로)은 ‘말함과 들음’이 뉴런처럼 동시적으로 발생하지만 엄격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과학적으로 접근하더라도 화자가 내뱉은 언어는 소리음파로서 340m/s로 움직이므로, 화자의 입에서 출발한 음파는 청자의 고막에 도달했을 때 음파와 분명 다를 것이다. 말함과 들음은 같지만, 분명 다른 존재다. 니클라스 루만의 핵심이론은 ‘생각과 말함’의 분리에 있다.
이철 교수는 “말함과 들음”에 매직펜으로 동그라미를 치면서, 바로 그곳이 니클라스 루만이 정의하는 “사회구조”라고 강조했다. ‘말함과 들음’을 사회구조로 정의하고, ‘생각’의 화자와 ‘수용’의 청자는 각각 독립체로서 자기생산적 체계(개인심리사회)를 이루면서, 사람은 ‘소통구조’로 완성된 사회와 끝없는 교류를 통해서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속에 사람들이 있지 않고, 사회는 별도로 존재하면서, 사람도 스스로 심리세계에서 자기생산적 체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상대와 소통을 할 때에는 ‘사회구조’를 통해서 소통을 하면서 존재한다는 새로운 이론이다. ‘말함과 들음’은 곧 ‘약속과 계약’과 같은 개념인 듯 했다. (교육생으로서 나의 인식이다.) 헬륨, 수소, 리튬, 나트륨, 산소 등의 독립적인 원자들이 상호작용을 통해서 헤아릴 수 없는 분자구조를 만들어내듯이, 사람과 사람의 생각교환 작용을 통해서 엄청난 사회구조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자주 활용하는 사회구조가 정치사회, 경제사회, 학문사회, 친밀사회이다. 이들의 소통구조는 코드가 정해져 있다. 편의점에 가서 값을 지불하고 라면을 사먹듯, 사회구조마다 약속의 소통구조가 각각이다. 경제사회는 ‘화폐의 지불’로 소통하고, 정치사회는 ‘표와 집권’으로 소통하고, 친밀사회는 ‘사랑’으로 소통하고, 학문사회는 ‘진리와 비진리’로 소통한다.
민주주의는 링컨의 연설문이 각인했듯,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로 자리매김했다. 인간에서 출발한 사회는 인간이 중심인 사회여야하는데, 니클라스 루만이 정의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사회의 배경이거나, 혹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울타리 밖으로 정의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이철 교수는 “인간에서 출발한 전통적 사회구조 개념을 벗어나서, 인간을 관찰하는 관점을 새로운 곳으로 옮겨서, 인간을 관찰함으로서 인간을 최종 종착역으로 해석한 것이 니클라스 루만이다”고 설명했다.
*** 취재후기 ***
솔직히, 니클라스 루만의 개념은 조감도(鳥瞰圖)처럼 인간에 대한 관찰자의 시각이 하늘위로 올려진 느낌인데, 나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사회속에서’ 쳐다본다는 것은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 수 있다는 지동설처럼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느낌이었다. 눈으로 보면 태양이 돌지만, 사실은 지구가 돈다는 것을 믿어야하는 과학자들의 관찰적 증거처럼, 사람들의 집합이 사회(社會)인 것은 ‘모일 사’(社)+‘모일 회’(會)의 한자만 풀어봐도 분명한데, 사람과 사회를 분리하고, 사람의 유기체와 심리체계는 사회구조에서 배제된 채, 심리체계에서 발생하는 의식의 표현들이 서로 통보하는 그 경로들의 집합체를 사회로 정의하고, 그 사회속에서 다시 인간을 내려다본다는 놀라운 지동설적 태양의 관점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의 우주를 보는 느낌이었으나, 여전히 땅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인 지금 현대인들에게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는 많이 앞선 이론인 듯 했다. 나의 지식의 수준으로 논하자면, 틀릴 수도 있다는 비판을 무릎쓰고서, ‘자기생산적 체계’는 개인 스스로 자기독립체로서 사회를 구성한다는 의미로 이해됐고, 마치 국회의원이 스스로 입법기관이고, 검사가 스스로 사법기관이며, 판사도 스스로 1인 법원이듯, 국회의원의 집합인 국회는 사실상 입법기관들의 입법기관이듯이, 사람은 ‘생각의 자유’로 말미암아, 스스로 무한한 창조적 생각을 펼치므로, 이미 스스로 완벽한 사회심리체계를 이루며, 완벽한 개인이 완벽한 상대와 서로 의사통보의 경로를 주고받으면서 그러한 경로들이 다양한 방법(문자, 언어, 인터넷, 책, 예술, 경제, 정치 등등)으로 펼쳐지면서 그러한 경로들이 약속으로 묶여서 결국 ‘사회구조’로 정의된다고 이해는 되었으나, 니클라스 루만의 방대한 철학에 대한 나의 개인적 소견일 뿐이다. 앞으로 시간을 두고 알아보고 싶은 인물이며, 사상이라고 생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