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성…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
철옹성…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월명동 약수샘 옆에 ‘오직 하나님’ 바위가 있다. 다른 돌에 기대어 비스듬히 세워진 돌이다. 그 언젠가 넘어진 일이 있었고, 그래서 ‘위험한 바위’로 주홍글씨가 되버린 바위다. 왜 ‘오직 하나님’의 바위가 넘어졌을까? 우리는 모두 머리위에 ‘하트’를 하고,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단체사진이나 행사때마다 “하나님, 성령님, 성자주님 사랑합니다”라고 하고, 주일말씀 수요말씀 새벽말씀을 날마다 듣는데, 왜 넘어질까?
넘어지면 위험한 것이고, 산속에서 바위가 넘어지면 넘어진대로 살아갈 것이지만, 큰 지도자가 넘어지면 그 충격은 파급력이 크다. 폭탄이 터지는 것보다 피해가 심각하다. 1차 세계대전이나 2차 세계대전을 보면 지도자의 사상이 제국주의의 극단적 사상으로 변질되어 넘어지니, 유럽과 세계에 전쟁의 피해를 입혔다.
‘오직 하나님’의 바위는 “바위로서” “오직 하나님”을 항상 말하고 있다. 입술로 “오직 하나님” “오직 말씀” “오직 사랑”을 외치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 이마에 인을 박듯이 그 바위는 얼굴에 ‘오직 하나님’이라고 글씨를 썼다. 모든 사람이 이름이 있듯이 그 바위는 자신의 이름을 온 몸에 새겼다. 그런데 넘어졌다. 아주 오래전 장마철에 발생한 사건이고,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위험한 돌’이 되고 말았다.
받침돌 때문이다. 반석위에 집을 세우면 넘어지지 않지만, 모래위에 세우면 넘어진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위에 집을 세워야한다고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근본은 아니다. 그 성경구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반석의 본질을 알 수 있다. 반석의 본질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7:24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집은 곧 신앙이다. 각자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하는데, 반석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땅은 곧 그리스도이다. 인생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간다. 그리스도는 곧 땅이고, 하나님은 하늘이다. 우리가 만약 “주여 주여 주여”라고 한다면, 그것은 땅위에, 모래위에 집을 짓고, 바위를 올려놓는 것과 같다. 그러한 집은 장마철에 무너진다. 장마로 흙이 쓸려서 그렇다. 반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날마다 지키면서 행하는 자는 ‘반석의 주춧돌’을 세우고서 그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서, 홍수가 나고 지진이 발생해도 안전하다. 바닥공사를 어떻게 하느냐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 바닥공사는 곧 기초공사이며, 말씀을 어떻게 배우고 행하느냐이다.
신앙생활은 100m 달리기가 아니다. 사람이 평생 밥을 먹고 살아가고, 평생 배우면서 살아가듯이, 신앙생활은 마라톤처럼 길게 내다보고 가야한다. 100m 달리기는 스타트를 빠르게 하지만, 마라톤은 처음 달리기가 끝까지 이어지게 꾸준히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처음 말씀을 들을 때, 어떻게 듣느냐가 중요하다. 듣는 자세가 그저 적는 것에 집중되고, 혹은 말씀을 지식으로 듣고, 건성으로 듣는다면 말씀은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반면, 말씀을 머릿속에 각인하는 사람은 스폰지처럼 흡인력이 빠르고, 뿌리가 깊게 내린다. 뿌리가 깊게 내린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말씀을 들으면서 “날마다 들어보라”고 해서, 토요일과 평일 자율학습 시간까지 빼서 들었다. 참으로 귀중한 시간이었고, 내 인생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말씀을 모두 들은 후에, “새벽기도를 하면 좋다”는 조언을 듣고, 고3 시절 날마다 4시에 새벽기도를 했었다.
국민대에 입학했는데, 선배들의 삶은 나와 많이 달랐다. 말씀을 잘 전하고, 강의도 잘하는데, 실천은 잘 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점 그들을 닮아갔고, 결국 내 삶은 무늬만 신앙인, 내면은 세상인으로 변질되었고, 해병대 시절 나는 무늬까지 세상인으로 변했다. 말씀을 지식으로 알고, 행함이 없는 자는 신앙이 죽은 자에 불과하다. 드라마 ‘검법남녀’를 안 봐도, 시체는 썩은 냄새가 날 수 밖에 없다. 시체가 발견되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법의관은 ‘사인규명’을 위해서 부검을 실시한다. 사망에 이르게 한 근본원인을 찾는 것이 부검이다. 신앙도 그처럼 사망에 이르는 근본원인이 있다. 국민대 1학년때 날마다 전도했고, 날마다 강의훈련을 했고, 날마다 만났고, 날마다 기도했다. 나름대로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았고, 자주 그를 운동으로 만났었다. 그러나, 신앙은 점점점 세상으로 기울었다.
왜 그랬을까? 말씀으로 분석하면, 말씀을 행하는 정신이 퇴색되어서 그렇다. 말씀은 절대적으로 실천해야 유익이 있다. 말씀은 곧 명령(命令)과 같아서 행하면 살고, 행하지 않으면 죽는다. 말씀을 좋은 말로 생각할 것이면, 차라리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더 낫다. 말씀을 듣는 근본 목적은 “행함”이다. 말씀의 행함은 곧 오직 하나님 바위가 ‘좌대’(座臺) 위에 놓인 것과 같다. 행할 행(行)은 사람이 두 다리로 서있는 것이다. 그처럼 ‘오직 하나님’ 바위도 비로서 좌대의 두 다리로 튼튼히 서게 된 것이다. 사람이 걸을 때 안전하듯, 말씀은 행할 때 가장 안전하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신앙은 앉은 뱅이 신앙에 불과함을 진정 깨닫는다.
내 칼럼을 읽고 감동을 받은 자도 있고, 내 칼럼이 문제가 있다면서 신고하는 자도 있고, 건성을 읽는 자도 있고, 악평자를 이기는데 무기로 사용하는 자도 있고, 그의 영광을 가린다고 판단하는 자도 있고, 그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좋아하는 자도 있고, 전도하는데 활용하는 자도 있다. 각양각색이다. 어떤 자는 사명을 받고서 내 칼럼을 덮는 자도 있고, 어떤 자는 사명을 받고서 내가 글을 쓰도록 격려하는 자도 있다. 어찌 이리도 다양할까? 모두 각자 신앙의 위치가 그러하다. 신앙의 좌표가 그러한 것이다.
나는 1999년 잃었던 신앙을 되찾을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쉽지 않았다. 제일 어려웠던 것이 사람들이다. 내가 오직 하나님을 찾고, 말씀대로 신천하려고 하면, 주변에서 사람들이 “뭘 그렇게 하느냐”고 흔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내가 3천권의 책을 쓸 때까지 나를 격려하고 힘을 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이다. 누가 나를 직접 가르쳤는가? 없다. 오직 말씀을 통해서 지금에 이르렀고, 나를 재전도, 관리해준 그 사명자의 도움이 참으로 컸고, 그 사명자가 사랑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수족(手足)임을 믿으니, 그리스도의 절대적 도움을 받았음을 또한 고백한다.
영화 늑대소년처럼 나의 신앙은 점점점 회복되었다. “먹어!! 하면 먹어!!” 그것을 알아듣기까지 늑대소년은 참으로 힘들었다. 신호등을 지키듯, 말씀을 날마다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그것을 몸에 익하기까지 참으로 긴 세월이 걸렸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결국 날마다 말씀을 준행하면서 내 생활터전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내 인생을 결정함을 더더욱 깨닫는다.
말씀의 거울앞에 서게 되면 2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말씀의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고치는 자. 다른 하나는 말씀의 거울을 지적하는 자이다.
말씀을 배우면 양과 염소 2가지 부류로 갈린다. 양은 말씀을 오직 말씀을 좋아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고치는 자, 염소는 말씀의 정보를 빼돌려서 자신의 것으로 삼고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말씀을 이용하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