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21~45
오늘 본문은 4가지 사건이 나온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갔다. 그들은 5명이다. 예수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4명의 어부들은 주님을 바짝 따른 것이 아니고, 그날 회당설교에 초청받았다. 안식일에 안식일을 지키도록 권면을 받고, 주님의 설교를 들었던 것이다. 그때, 서기관과 전혀 다른 주님의 권위를 보고, 귀신까지 주님을 알고 무서워서 떠나가는 기적을 보면서, 온 동네에 소문이 퍼졌다.
설교후, 베드로의 집에 가셨다. 그곳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앓아 누워있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집이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표현했다. 베드로가 장모 댁에 있었다면, 눈치가 보여서라도 그물을 버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얹혀 사는 사람은 장모다. 그런데, 베드로의 아내는 어디에 있을까?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가버나움에서 가장 인기있는 직장, 수산업 전문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가 되겠다고 했으니, 아내로서 “아멘!”으로 화답했을까? 아내가 그렇게 했다면, “베드로와 그 아내가 함께 그물을 버렸다”라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아내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친정 어머니를 집에 모시면서 보살펴주는 남편의 자상함에 말을 못했을 것이다.
새벽 미명, 한적한 곳에서 주님은 기도하셨다. 사람들이 몰려들면,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나는 일이 책처럼 쌓이면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괴로운 사건이 화살처럼 나를 관통하면, 역시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 기도는 드라마를 보듯, 의도적으로 습관적으로 해야한다. 하지 않으면, 기도의 근력도 낙후된다. 기도는 용불용설이다. 쓰면 쓸수록 강하게 진화된다. “이웃 마을로 가자”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집에 붙박이로 있지 않으셨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설교를 할 때, 베드로는 따르지 않았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따랐다”라고 했으나, 누가복음에는 베드로가 함께 가지 않고, 그물질을 했다. 장모가 열병에서 치료받고, 아내가 무슨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그날, 문전성시를 이룬 사건으로 쌀독이 모두 떨어졌던지…. 당장 자식들 교육비가 없었던지….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
밤샘 작업에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아침에 주님께서 배를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주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니, 그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다가 엄청난 수확량을 얻고, 동업자인 요한도 그 사건을 계기로 주님을 따랐다. 베드로는 주님께 무릎을 꿇고 “죄인입니다”라고 참회했다. 한 사람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긴 세월의 몸부림이 필요하다.
나병환자가 주님께 꿇어 엎드려 간구했다.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주님은 불쌍히 여겨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니 나음을 받았다. 격리당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가? 차별할 수 밖에 없는 자에게 다가가 그 사람과 접촉하고, 그 사람과 함께 같은 방에서 살 수 있는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감옥에 갇힌다는 뜻이다. 할 수 있는가? 나병환자가 되지 않고는 나병환자와 함께 살 수 없다. (주님은 치료받은 나병환자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소명의 근원을 이루기까지 해야할 일이 있는데, 병만 고치느라 그 소명을 감당할 수 없으면 안되기때문이다.) 권능을 맛본 가버나움은 마태복음 11:13에서 심판받았다.
주님은 권위있게 말씀을 전했다. 곧 설교다. 복음전파는 설교다. 성경강의도 설교다. 무엇을 하더라도 빛의 아들로서 세상 가운데 주의 진리를 외쳐야한다. 귀신들을 몰아내신 주님! 광야에서 마귀를 몰아내고, 지역사회에서도 귀신들을 박멸하셨다. (코로나는 어떤 군대귀신들의 집합체인가?) 베드로의 장모 열병도, 예수님이 그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일어났다. 무슨 병이었을까? 베드로의 장모가 일어나듯 주님도 부활했다. (예수님은 시체도, 무덤도 없다. 그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일 뿐, 주님의 시체가 없으니, 주님의 무덤이 아니다. 며칠 긴 잠을 주무신 안식처였다.)
주님은 가까운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셨다. 성경말씀도 다양한 마을을 돌아다니며 묵상하는 것이 좋다. 구약과 신약 마을을 옮겨다니며 성령의 은혜를 체험해야한다. 주님은 나병환자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탕자를 포옹하듯, 주님은 그 환자에게 은혜의 손을 내미셨다. 주님의 마음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사회적 격리를 당한 그 환자는 주님의 손길로 정상이 되었다. 하나님과 결별한 사람마다 주님의 치료를 받고 하나님과 연합한다. (창세기 3장 사건으로 선악과는 인간의 영혼에 나병을 가져왔다.)
장모는 딸 때문에 열받았나? 사위때문인가? 열병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인생은 죄로 말미암아, 삶속을 찾아오는 각종 사건으로 말미암아 드러눕는다. 주저 앉는다. 나도 그렇다. 이불을 덮고, 암흑의 잠에 갇힌다. 그때, 주님은 홀연히 오셔서 그 영혼을, 그 마음을 위로하신다. 주님께서 내 마음의 불량품을 A/S해 주신다. 성령의 불로, 수술해 주신다.
그물을 버려둘 때, 아내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삭을 바치러 갔을 때, 아내 사라의 마음은 어땠을까? 남편이 그물을 버리는 기회비용은 아내와 상관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즉각적인 결단과 행동을 묘사했으나, 누가복음은 베드로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말하고 있다. 로또 직장을 과연 쉽게 버릴 수 있는가? 부자청년이 돌아갔을 때,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한 것은 “가치있는 어부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적 개념이다. 지금의 어부와 성경적 어부는 전혀 다르다.
나타난 그림에서 감춰진 그림을 그리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아내는 아직 전도되지 않았거나, 마르다처럼 밥을 준비하고 있었거나, 남의 집 밭일을 갔거나, 어쨌든 복음의 사건에서 베드로 아내는 방관자이며, 구경꾼이다. (최소한 반대자는 아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버렸던 것은 밤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을 때, 탕자처럼 절망에 처했을 것이다. 그물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인생은 그 자체로 ‘탕자’다. 그때, 주님은 오신다. 모든 것을 주시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