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대노하셨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전통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평가하고, 고발했다. “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한 것이다. 마가는 왜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 마가복음이 출판될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초대교회에 상당수 들어왔고, 유대인적 관습이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위에 있게 됐다. 그것때문에 바울도 투쟁하면서 ‘은혜의 중요성’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침이 마르도록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율법과 복음’의 이분법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매우 잘못된 개념이다. 개념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변질된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개념’을 뒤집었다. 개념 즉 기준이 바뀌면, 선악도 바뀐다. 그래서 ‘개념’을 바꾸면 정말로 안된다. 율법과 복음은 성경적이지 않다. 누구도 ‘율법과 복음’으로 나누지 않았다. 근거는 명확하다. 신약복음은 4C가 되어서야 완성됐고, 그전에는 사도들의 전승으로 ‘성경’을 위한 기록물로 읽혔을 뿐이다. 초대교회가 성경이라고 한 것은 ‘구약성경’ 외에는 없다. 율법 즉 성경말씀을 어떻게 읽을 것이냐가 핵심인데, 사도들의 전승인 신약복음이 ‘은혜’의 관점에서 구약말씀을 읽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구약성경은 멀리하고, 신약성경만 읽으니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대노한 것은 ‘형식적 종교행위’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심이 굉장히 좋았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날마다 기도를 하고, 날마다 찬양을 하는 종교집단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펼쳐져 있고, 식탁도 하나님의 제단이 될 수 있으니 집이 곳 성소라고 말했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섬긴 집단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이 왜 예수님과 충돌했을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일까? 결코 아니다. 사람과 관계에서 발생한 갈등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형제를 고발했다. 명분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마가는 ‘바리새파’를 공격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느냐”를 묻는 것이다. 사도들의 전승을 지킨다면서, 형제들을 평가하고 고발하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라고 할 수 없다.
먹는 문제는 유대인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인도에서도 이러한 음식습관이 있다.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절대 먹지 않는다. 또한, 스님들도 육식을 먹지 않는다. 육식을 먹든지 먹지 않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음속에서 무엇이 나오느냐가 핵심이다. 마가복음 7장 21절에 보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쓰레기가 가득함을 알 수 있다.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악한 생각과 우매함과 악독과 속임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이다. 바리새인들에게만 있을까?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것들이다. 교회에 다니면 이러한 요소가 사라질까? 성령을 받으면 없어질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을까? 사람은 누구든지 이러한 요소가 가득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스리고 통제하느냐가 관건이다. 도덕적 행위로서 마음을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착한 행실로서 마음이 다스려진다면, 이 세상은 벌써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행실은 행실이고, 마음속에는 여전히 악한 생각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 그러한 마음을 조금씩 다스리면서 살아갈 뿐이다.
마가복음 7장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교육은 상당히 쉽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르쳤다. 반면,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입술로만 떠드는 신앙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모두 깨끗하고, 입에서 나오는 그것들이 더럽다”고 말씀했다. 음식과 언어를 이렇게 적절하게 연결해서 교육한 것이 예수님의 성경공부다. 성경공부는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해야한다. 교리에만 입각해서, 종교용어를 사용한다면, 일반인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성경은 사람들을 위한 책인데, 신학용어를 활용해서 성경을 가르친다면, 그러한 성경공부는 미련스러운 것이다.
청와대 기자회견문은 ‘중학생 수준의 문법’에 기초한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인들이 만약에 난해한 사자성어’와 ‘정치학 용어’를 사용하면서 기자회견문을 발표한다면,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일반인이 이해하지 못할 때, 누가 어리석은 것일까? 정치인이 어리석은 것이지, 백성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정치인은 지도자로서 백성이 알아듣도록 설명할 책무가 있는데,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복음서는 그 시대 길거리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기록됐다. 그 사실을 간과하면 절대 안된다.
성도를 위한다면, 설교내용에 종교의 전문용어가 최대한 배제되는 것이 좋다. 설교는 성도를 위한 것이지, 설교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설교내용에 3~4개 이상의 종교 전문용어가 등장한다면, 그 용어를 설명하다가 설교가 끝난다. 설교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이유는 이것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용어는 누구나 사용하는 생활단어로서 대체될 필요가 있다. 설교학에서 이러한 내용을 알려줘야하는데, 한국 신학교는 설교학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국교회는 이단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이단들이 가르치는 성경공부가 얼마나 쉽고 재밌는지 그것을 파악해서, 성경을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성경공부를 해야할 것이다. 그래야 한국교회도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