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떡을 먹고 산다고 믿겠지만, 사실은 빛과 소리를 먹고 산다. 눈을 뜨면 시각적 색채가 눈에 들어오고, 귀를 통해 만물과 각종 소리들이 들어온다. 성경은 “소리의 구별”을 요구한다. 들리는 모든 소리를 듣다보면, 잡음도 들린다. 음식을 가려서 먹듯이 음성도 가려서 들어야 한다. 그것이 지혜다. 사람은 하루에 70%를 소리와 함께 살아간다. 과연 소리는 음식이다. 음악은 소리의 대표적 음식이다.
화법은 삶의 공유다. 대화는 그저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말속에는 감정과 인생이 모두 담겨 있다. 화법은 자신을 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입과 입을 맞춘다. 마음이 맞는 사람은 말을 통해 입술과 귀를 맞춘다. 감정의 공유는 말을 통해 연결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 그저 막연하게 감정이 전달된다고 믿지만, 자기 생각이다. 감정은 언어를 통해 서로 느끼는 것이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속에서 과연 쓸만한 말이 얼마나 있는가? 하루종일 말해도 살과 피가 되는 말은 별로 없다. “사랑한다”는 말이 넘칠수록 세상은 이혼율이 증가한다. 말로만 떠드는 사랑에는 ‘사랑의 실체’가 빠져서 그렇다. 화법은 말의 논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화법은 사람의 인격을 언어로 담고 빚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대해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의사소통을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사회생활의 90%는 의사소통 능력이다. 사람끼리 말싸움을 하는 이유도 ‘의사소통’의 부족때문이다. 의사소통이 무엇인지 알면, 사는 것이 재밌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음성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의사소통’이라고 보통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다. 말의 전달이 의사소통이라면, 이 세상은 이미 소통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말이 넘쳐나지만, 세상은 소통지옥이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고, 인류가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언어의 상징체계’ 덕분이다. 언어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합하고, 죽은 자와 산 자가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문명은 문자의 정보위에서 건설됐다. 의사소통은 우선 인간이 말과 글로 상호간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의사소통의 어원은 ‘나눔’과 ‘함께’와 ‘분배’다. 의사소통은 서로의 감정과 정보를 함께 나누는 행위다. 의사소통은 반드시 “인간”과 “삶”이 출발점이고, 이후에 “말”이 전달매체다.
지금껏 우리는 의사소통을 ‘정보전달과 이해’로 인식했다. 편협적 개념이다. 의사소통은 상대와 함께 나누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달”의 개념으로 본다면, ‘소음’이 없다면 소통이 100%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소음이 없다고 해서 과연 소통이 이뤄질까? 남녀가 밀실에서 서로 대화를 한다. 과연 서로 소통할 수 있을까? 의견이 틀어지면 아무리 말을 해도 먹통이다.
A가 ‘무엇’을 말하면, B는 ‘무엇’을 B의 입장에서 받아드린다. A가 말한 ‘무엇’과 B가 듣는 ‘무엇’은 전혀 다르다. 내가 편의점에서 초콜릿과 새우깡과 빵과 포도주와 라이터를 샀다. 그리고 “비닐”이라고 했더니, 여자 점원이 빙긋 웃더니, 글쎄 담배를 꺼냈다. “비닐”을 “던힐”로 인식한 것이다. 내가 “비닐요”라고 하자, 그녀는 날 한참 쳐다보더니, “아!”라고 감탄사를 발사하고, 담배를 다시 넣었다. 그리고 비닐봉투를 줬다. 내가 말한 “비닐”과 그녀가 들은 “비닐”에는 차이가 있었다. “언어”는 전달과정에서 각자 사람의 고막을 통해 뇌로 전달되면서 변화와 왜곡과 굴절이 발생한다. 이것을 “상호교섭”이라고 부른다.
상호교섭의 차이점이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는 A와 B의 경험과 인식구조가 전혀 다르기때문이다. 차이점과 오차를 줄이는 방법은 “소통”을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하면서 서로 의견을 교류하는 것이다. 마치 내가 “비닐요”라고 다시 말한 것과 같다. 다시 말하니까 여자 점원은 “던힐”에서 “비닐”로 인식을 바꿨다.